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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8

하루 세끼 시리얼만 먹던 대학생이 메타 E7 엔지니어가 되기까지

몰로코 인턴부터 메타 시니어 스태프까지 10년 — 레벨마다 받은 피드백과 배운 것들의 기록.

대학 기숙사 시절, 나는 하루 세끼를 시리얼로 때웠다. 시리얼은 싸고, 빠르고, 그럭저럭 배가 불렀다. 과외 몇 탕에 알바, 조교 자리를 서너 개씩 돌려가며 용돈을 벌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시리얼 먹던 대학생이 올해 메타에서 E7, 시니어 스태프 엔지니어가 되었다.

미리 말해두자면, 나는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0년을 돌아보면 나를 키운 건 재능이 아니라 피드백이었다. 매 시절 들었던 말이 있었고, 그 말이 아팠고, 방어하지 않고 받아들였더니 다음 단계가 열렸다. 그게 전부다.

그래서 이 글은 자랑이 아니라 기록이다. 시절마다 세 가지씩만 적어보려 한다. 무슨 프로젝트를 했는지, 어떤 피드백을 받았는지, 그래서 무엇을 배웠는지.

시작은 금융권이었다

사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한국에서 공부를 잘하던 학생이 아니었다. 적응을 잘 못해서 반강제로 유학을 갔고, 중학교 2학년에 퀘벡의 별 볼 일 없는 기숙학교에 들어갔다. 게임이 막힌 기숙사에서 그때 처음으로 정신을 차렸던 것 같다. 하키를 하고, 꿀리지 않으려고 공부를 했다. 미국 고등학교도 명문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거기서 볼 꼴 못 볼 꼴을 다 보면서 다짐 하나는 확실히 새겼다. 무조건 성공해야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다짐이 여태까지의 연료였다.

존스홉킨스는 수학으로 들어갔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전공을 고를 때 어떻게 하면 차별화가 될까를 쟀고, 그나마 제일 잘하는 게 수학이었다. 목표도 솔직했다. 은행 가서 최대한 빠르게 돈을 벌어서 은퇴하고, 내 카페를 차려야지. 부귀영화보다는 햇살 드는 예쁜 공간에서 넉넉하게 사는 게 꿈이었다. 꽤나 진심이어서, 입대 전에 인턴도 스탠다드 차타드 은행 홀세일 뱅킹에서 했다.

그런데 웃긴 건, 정작 좋아했던 수업은 전공 수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Presentation, leadership theory, psychology 같은 문과 수업들. 이 취향이 나중에 어떤 복선이 되는지는 그때는 몰랐다.

방향이 꺾인 건 군대였다. 군대에서는 시간이 많으니 처음으로 인생을, 목표를, 꿈을 생각하게 되더라. 마음 맞는 동기를 만나 밤마다 인생 얘기를 했고, 책도 나답지 않게 많이 읽었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라는 직업이 있다는 것도, 코딩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복학하고 나서는 같이 죽기 살기로 공부하던 친구가 서머 캠프에서 코딩을 배워 와서는 말했다. 너 무조건 해야 된다고. 그렇게 정작 듣고 싶었던 Jazz History를 포기하고 Introduction to Java 수업에 딱 한 번 들어가 봤는데, 거기서 나온 나의 한마디가 인생을 바꿨다.

"이거 재밌네..?"

수업이 재밌다고? 숙제를 재미로 한다고? 적잖은 충격이었다. 수학은 아무리 공부해도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답답했는데, 코딩은 하는 만큼 결과가 보였다. 완벽한 이론보다, 확률적으로라도 뭔가 만들어질 때 재미를 느끼는 사람. 그게 나였다. 2학년 말, 컴퓨터공학 복수전공으로 방향을 틀었고 수학은 컴퓨터공학을 더 잘하기 위한 부전공이 되었다.

"알렉스님은 한 60점 정도? 인 것 같아요"

CS를 늦게 시작한 대가는 취업 시장에서 돌아왔다. 남들이 주니어 때 하는 인턴십이 없어서 무급 리서치 어시스턴트를 전전했고, 그다음엔 취미가 입사지원이냐는 소리를 들을 만큼 지원서를 넣었다. 당시 정리하던 엑셀 파일에는 회사가 180개 쌓였다. 최종 합격은 단 두 곳 — 스타트업 몰로코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인턴, 그리고 제약회사 Express Scripts의 데이터 사이언스 인턴이었다. 군대에서부터 꿈꾸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눈앞에 있었는데, 나는 몰로코를 골랐다. 한 끗 차이였다. 그때 데이터 사이언스를 골랐다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20명이 안 되는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원래는 3개월만 할 인턴이었다. 처음엔 눈치만 봤고, 혼날까 봐 신중하게만 했고, 질문도 상황 봐가며 했다. 학교에서 하던 그대로, 100점짜리 하나를 완벽하게 만들려고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1.5개월 차 중간평가에서 코파운더님께 이 말을 들었다.

"음.. 제가 봤을 때 알렉스님은 한 60점 정도? 인 것 같아요"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표정관리는 어떻게든 했지만. 이유는 하나였다 — 너무 느리다는 것. 스타트업에서 중요한 건 완벽이 아니라 속도와 성과였는데, 나는 그걸 몰랐다.

그날부로 "살짝 미친듯이" 일하기 시작했다. 앞뒤로 백한 가지를 따지기보다 일단 달렸고, 프로젝트 서너 개를 동시에 돌렸다. 평가가 뒤집혔고, 3개월짜리 인턴은 휴학까지 하며 1년이 되었다. 프론트엔드를 해본 적도 없는데 담당이 나 혼자라 앱을 지웠다 다시 만들기를 여섯 번 했고, 모바일 SDK부터 인프라, 데이터 모델, 파이썬 자동화, ML까지 가릴 것 없이 다 했다. 나중에는 인턴 주제에 CTO님과 프로덕트 방향을 두고 논쟁까지 했다.

여기서 내 첫 직업관이 생겼다. 질보다 양이다. 회사는 이윤을 창출하는 곳이지, 완벽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100점 1개보다 80점 100개가 회사를 돕는다.

찍먹만 하려던 대기업

페이스북은 사실 한 번 떨어진 회사였다. 파이널까지 갔다가 고배를 마셨는데, 떨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아 인터뷰하는 기회가 왔고 거기서 붙었다. 몰로코에 정이 많이 들어서 끝까지 고민했다. 결국 찍먹만 하고 오자, 대기업 구경이나 하고 오자는 마음으로 3개월 인턴을 갔다.

그리고 돌아가지 못했다.

뉴스피드 그로스팀이었다. 1년을 풀타임처럼 일해본 인턴이라 아웃풋은 압도적이었는데, 정작 여기서 처음 배운 건 코딩이 아니었다. 디자이너와 소통하는 법, PM과 일하는 법, 글 쓰는 법, 설득하는 법. 성실하고, 투명하고, 능동적으로 — 이 세 가지로 밀었더니 리턴 오퍼가 거절할 수 없게 나왔다.

"너를 better problem solver로 만들어주겠다" — E3

입사하면 부트캠프라는 기간에 팀을 고른다. 나는 열 개 팀의 매니저를 만났다. 관심은 브랜디드 컨텐츠나 React 플랫폼 쪽이었고, 광고팀은 피하려고 했다. 몰로코가 광고였고, 온콜의 빡셈을 알았으니까.

그런데 인스타그램 광고팀의 한 매니저를 만나고 완전히 반해버렸다. 30분 얘기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사인을 하고 있었다. 그가 그때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너를 코딩 잘하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better problem solver로 만들어주겠다. 스택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씩 다 해보게 해주겠다."

지금까지도 그 말대로 되고 있으니, 회사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

돌아보면 이때의 결정이 커리어에서 제일 중요했다. 팀을 고르는 것, 그리고 매니저를 고르는 것.

팀은 성장 궤도를 봐야 한다. 당시 인스타그램 광고팀은 70~80명 규모였는데, 인스타그램은 이제 막 수익화를 시작했고 유저는 아직 10억 명도 되기 전이었다. 무조건 클 수밖에 없는 팀이었다. 실제로 조직은 1,000명 규모까지 컸고, 나는 그 성장에 올라타서 같이 컸다.

매니저는 나를 키울 사람인지 봐야 한다. 코치해주고, 제대로 된 피드백을 주고, 동시에 지지해주는 사람. 서로 공명하고, 솔직하고 투명할 수 있는 사람. 피드백으로 크는 커리어라면, 그 피드백을 줄 사람을 고르는 게 절반이다.

주니어 시절의 주 프로젝트는 Ads Post Processing Framework, 쉽지 않은 인프라 일이었다. 시애틀로 출장 가서 시니어 한 분과 파트너로 밤새워 코딩하며 딜리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렇게 1년 만에 첫 승진을 했다. 이 시기의 기준은 결국 이거였다. 맡은 일을 혼자서 끝까지 해내는 것. Independence. 그리고 그걸 받쳐주는 성실함과 꾸준함.

이때까지 내가 생각한 뛰어난 개발자는 용병이었다. 문제 하나를 보면 그걸 풀기 위해 혼자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싸우는 용병. 지쳐 쓰러지지 않는 개발자가 최고인 줄 알았다.

용병에서 제갈공명으로 — E4

E4에서 E5로 가는 게 커리어에서 제일 어려웠다. 이때부터는 코딩이 아니라 behavioral로, 엔지니어가 아니라 리더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Growth, maturity, leadership, team direction. 기준 자체가 바뀐다.

제일 막막했던 건 이거였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데, 스스로 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 그게 E5의 기준이었다. 프로포절, 디렉션, 에스컬레이션, 디리스킹, 로드맵핑, 스트래터지 리뷰 — 전부 이 구간에서 처음 해봤다. 받은 피드백은 이랬다. "더 멀리 생각해라.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큰 사업이 될 수 있는지 봐라."

그때 깨달았다. 진정으로 뛰어난 개발자는 용병이 아니었다. 커뮤니케이션에 능하고, 우선순위를 정확히 알며, 프로덕트의 미래를 먼저 내다보고, 다른 엔지니어를 성장시키는 사람. 관우나 장비가 아니라 제갈공명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디렉션이 코드보다 더 큰 value add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리소스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이 점점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이 가장 중요한 리소스"라는 전제가 몇 년 뒤 뒤집히는 걸 보게 되지만 — 그건 다음 글의 이야기다.

Ads Preview 시스템을 React 풀스택으로 재작성한 게 결정적이었고, 1년 반 만에 시니어가 되었다.

같은 레벨에게 value add를 하라는 말 — E5

시니어가 되고 한참을 일하다 보니, 내가 멘토하던 주니어들이 하나둘 시니어가 되어 있었다. 뿌듯했다. 그런데 그때 받은 피드백이 꽤 당황스러웠다.

"이제 다른 E5들에게 직접 value add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돼라."

매니저에게 들은 말이었다. 같은 조직의 E5도 아니고, 다른 조직, 다른 팀의 시니어에게까지. 시니어가 시니어에게 어떻게 value add를 하지? 내가 이런저런 조언을 해도 되나? 어이없어하는 거 아닌가? 한참을 고민했다. 답은 기술이 아니었다. Value add는 technical strength만이 아니다. 리더십, de-risking, proactivity, ambiguity를 정면으로 받는 것, 아무도 안 하는 dirty work, 그리고 코칭.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하고,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데서 value add가 나온다.

이 시기의 주 프로젝트는 Advantage+ Creative, ML로 광고 소재를 최적화하는 플랫폼의 TL이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워룸이다. 프로젝트에 풀리지 않은 질문과 리스크가 너무 많아서, 일단 50개를 전부 적었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권자 열다섯 명쯤과 한 명씩 1:1을 돌았다. 솔직히 나도 모르는 게 태반이었다. 그래서 더 물었다. 그들의 아이디어와 인풋을 구글닥에 전부 받아 적고, 옵션을 하나씩 분석하고, 30~40명이 모인 자리에서 다시 align하고 — 그걸 일주일 내내, 하루 일곱 시간씩 반복했다. 답을 아는 사람이 리드하는 게 아니었다. 질문을 끝까지 닫는 사람이 리드하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 때 그렇게 좋아했던 presentation과 leadership 수업이 여기서 복선을 회수했다.

Plan A부터 F까지 — E6

스태프가 되고 나서의 게임은 incremental revenue였다. GenAI로 광고 소재를 만들어내는 플랫폼. 인스타그램 스토리 광고의 CTA 텍스트를 LLM으로 다시 쓰는 일 같은 것들 — 광고 소재마다 사람들의 니즈를 반영하려는 시도였다.

말은 쉬운데, 숫자가 나오지 않았다. 가설 두세 개를 세우고 실험을 돌렸는데 안 됐다. 바꿔서 또 돌렸다. 또 안 됐다. 결국 여섯 번, 일곱 번을 될 때까지 전부 바꿔가며 돌렸다. 리뷰는 리뷰대로 혹독했다. "대충 이런 것 같아요"는 절대 통하지 않았고, 바닥에 있는 마지막 퍼즐 조각까지 맞춰가야 했다. 끈기라는 게 뭔지 여기서 배웠다.

이 시기의 피드백은 전부 같은 방향을 가리켰다. 특히 내 멘토 — E9이고, 철저하고, objective하고, 모든 상황을 꿰뚫어 보는, 그래서 좀 빡센 리더 — 가 해준 말이 지금도 박혀 있다.

"Motion is not progress."

바쁜 것과 나아가는 것은 다르다. 일을 많이 한다고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걸, 스태프가 되어서야 뼈로 배웠다.

그래서 배운 건 하나로 요약된다. Plan A, B, C, D, E, F까지 세워서, 어떤 일이 있어도 무조건 deliver한다. 모르는 스택 앞에서도 리더로서 끝까지 문제를 풀어낸다. 팀 사정이 어려울 땐 PM, EM의 빈자리까지 메워가면서.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비즈니스 임팩트를 내는 건 계속 어려웠다. 그 시기에 나를 지탱한 건 오히려 일 밖의 일이었다. GPT가 나오자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파서 사내에서 가르쳤고, 유튜브를 시작했고, 포스트를 쉬지 않고 썼다. GPT-4o 이미지 기능이 나온 날엔 광고 소재 생성 테스트와 eval을 만들어 돌렸다. 그게 눈에 띄어 GenAI 플랫폼 일로 이어졌다.

그리고 작년 말, Claude Code가 터졌다. 나는 발 빠르게 파고들어 만들 수 있는 건 다 만들었다. Skill evaluator, engineering harness 플러그인, 팀들이 쉽게 자기 플러그인을 만들게 해주는 domain knowledge 플러그인, 데이터 분석 플러그인. 포스트를 쓰는 족족 사내에서 바이럴이 됐고, 강의도 바이럴이 됐다. 그중에서도 Second Brain — 에이전트에게 기억을 만들어주는 솔루션 — 을 만들었을 때는 회사 안에서 만 명 넘게 썼다. 커리어에서 손꼽는 쾌감이었다. 어쩌다 보니 사내 인플루언서가 되어 있었다.

E6에서 E7은 실력만으로 안 된다. 운이 필요하고, 기회를 잡아야 하고, 내가 잘하는 것과 회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만나야 한다. 나중에 매니저에게 들은 피드백이 이걸 정확히 요약한다. "네가 그동안 risk taking하며 passionate하게 달려온 것, 네가 좋아하고 잘하는 게 회사의 니즈와 맞아서 잘 된 거다." 돌아보면 나는 그 교집합을 일 밖에서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To be continued — E7

그러다 회사에 새 조직이 생겼다. Agent Transformation — CTO 산하에 신설된 org였다. 에이전트에게 context를 만들어주는, context engineering을 회사 전체 기반에서 도와주는 솔루션. 내가 사이드로 만들던 바로 그것이 회사의 사업이 된 것이다. 그 테크리드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승진 소식은 매니저에게 들었고, 아내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만큼, 차차 어깨가 무거워지고 있다.

받는 피드백은 간결하다. "이제 industry 전체의 문제를 앞장서서 풀어라." 이제 푸는 문제는 세상에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다. 동시에 다른 E6들에게 value add를 하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고 있다. E7으로서 이제 증명해야 하고, 계속 나를 깎아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요즘의 다짐은 십 년 전과 똑같다. 공부하고, 배우고, 겸손해지고, 피드백을 잘 수용하면서 나아가기.

배운 점은 아직 쓸 수가 없다. 배우는 중이니까. To be continued.

똑똑해서가 아니다

돌아보면, 10년은 몇 마디 말로 요약된다.

"질보다 양이다."

"더 멀리 생각해라."

"같은 레벨에게 value add를 해라."

"Motion is not progress."

"이제 industry 전체의 문제를 앞장서서 풀어라."

전부 들을 때는 아팠던 말들이다. 그리고 전부, 방어하지 않고 받아들인 순간 다음 레벨을 열어준 말들이다. 나는 똑똑해서 올라온 게 아니다. 피드백을 받아들일 줄 알아서 올라왔다.

하나만 더 보태자면 — 일을 많이 하는 게 잘하는 게 아니다. 사업의 본질을 알고, 내가 이 조직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 결국 10년 내내 그게 진짜 게임이었다.

시리얼만 먹던 그 대학생에게 누가 이 말들을 미리 해줬다면 좋았을까. 아니, 어쩌면 직접 맞아가며 배웠기 때문에 내 것이 됐을 것이다.

이 여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